④시간, 불평등의 새 얼굴

장시간 노동체제 개선책

특례업종·특수고용·1차산업 등
주 52시간 미적용 여전히 많아
시간외 수당 포함 포괄임금제
‘공짜 야근’ 주범인데 제한 미뤄

‘저녁 있는 삶’ 공감 오래됐지만
‘시간 칼자루’ 회사가 쥐고 있어
“과도한 야간·주말노동 규제하고
직무가치 중심 임금체계 고려를”
주 52시간 근무제는 법정 노동시간(40시간)보다 불가피하게 일을 더 해야 할 경우(연장 노동시간 12시간)에도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지 말라는 제도다. 적게 고용해 대량 생산하려는 기업의 전략, 초과노동을 해야 생계비가 확보되는 임금체계, 낡은 교대제, 남성 외벌이 모델을 전제로 한 성별 분업 등이 구조적으로 얽혀 빚어낸 한국 특유의 ‘장시간 노동 체제’를 개선하고,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로 가보려는 시도다.

 

사실 주 52시간 근무를 하더라도 직장인의 삶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한 주 168시간 중에 52시간을 일하면 116시간이 남는다. 이 가운데 잠자고 식사하고 일터로 오가고 학습하는 데 98시간을 쓴다. 모두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시간이다.(2014년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나머지 18시간을 쪼개고 쪼개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쉬어야 한다. 오롯이 자신만의 휴식을 취할 시간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이보다 더 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시간은 더 사라진다.

 

■ 주 52시간제의 그늘 가장 큰 문제는 주 52시간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사업장이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상시 5인 미만 사업장, 육상운송 등 5개 특례업종, 농업 등 1차 산업 종사자와 감시·단속적 근로자(주로 경비), 학습지 교사와 택배기사 같은 특수고용 노동자 등은 노동시간 제한의 예외다. 이런 노동자가 2017년 현재 718만1천여명, 주 52시간 적용 대상 노동자의 83%에 육박한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이나 1차 산업 및 감시·단속적 근로자들에게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집중돼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제외할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테두리에 포함해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또한 특수고용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특정 사업체의 지시·감독을 받으며 일하지만 자영업자로 분류돼, 시간을 무한 소모하며 생계비를 벌고 있다. 특례업종은 올해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26개에서 5개로 줄었으나 이들 업종을 남겨두어야 할 합리적 근거를 두고는 논란이 여전하다. 시민 안전과 직결되는 운송 분야와 보건업에 특례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정작 차종별 사망사고 1위인 택시기사나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간호사 등의 무제한 장시간 노동을 허용함으로써 오히려 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은 5개 업종도 재검토해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할 필요가 제기된다.

 

■ 소득과 시간의 딜레마를 풀 열쇠, 임금체계 주 52시간제로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시도에서 또 다른 걸림돌은 포괄임금제다. 포괄임금제는 야간근로·연장근로 등 시간외 근로 수당을 실제 노동시간과 상관없이 기본급에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야근을 당연시하게 만들고, 실제 일한 것보다 임금이 더 적은 경우도 흔해 ‘공짜 야근’의 주범으로 꼽힌다. 하지만 계산상 편리하다는 등의 이유로 광범위하게 활용돼, 지난해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노동자 10인 이상 기업체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는 곳은 52.8%나 됐다. 정보통신업종의 장시간 노동이 문제가 되면서 노동부는 포괄임금제를 제한하는 내용의 지침을 만들었지만, 1년 가까이 발표를 미루고 있다. 그동안 경영계는 경제상황이 어렵다며 틈날 때마다 포괄임금제 제한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 법률원 신인수 변호사는 16일 “포괄임금제 제한은 획기적인 게 아니라 기존 대법원 판례를 반영하는 것인데 그것마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며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조건의 최저기준, 근로시간 규제가 규범력을 가지려면 포괄임금제는 전면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소득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이들은 별도의 소득보장 정책으로 보호하고, 그 밖에 일반적으로 노동시간과 소득이 동시에 줄어드는 이들을 위해선 직무 가치 평가를 중심으로 한 임금체계를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호봉, 성별, 고용 형태, 학력 등과 무관하게 오로지 직무의 가치에 따라 기본급을 결정하는 게 직무급제다. 서울시가 2013년 청소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직무급제를 도입했는데, 평균 16%가량 임금이 올랐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직무급에서 직무의 가치는 반드시 노동시간과 연계해야 되는 게 아니다. 비생산직 등을 중심으로 직무급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시간빈곤의 최전선, 여성 여성, 특히 아이가 있는 맞벌이 여성은 소득과 시간 모두 남성보다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게 여러 연구 결과로 입증돼 있다. 그 원인은 주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여성에게 집중된 탓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낸 <저소득 취약계층의 생활시간 사용과 정책과제> 보고서를 보면,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가사노동시간이 가장 크게 늘어나는 집단은 주중 맞벌이 여성으로, 고소득층은 주 128분, 중간소득층은 148분, 저소득층은 160분을 가사노동에 썼다. 그런데 소득 수준별 집단의 여러 특성을 통제해 분석해보면,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소득이 아니라 주휴무제의 차이였다. 주5일 근무를 하는 맞벌이 여성보다 주6일 근무 또는 격주 5일 근무를 하는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더 긴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근무형태는 판매 서비스직 등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보고서는 “판매 서비스직이나 단순노무직 영역에서 노동시간 특례제도로 인해 노동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빈번하고 과도하게 발생하는 야간·주말 노동을 규제해야 한다. 또 저소득층 맞벌이 가구엔 가사서비스 바우처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결국 핵심은 시간 주권 한 정치인이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 폭넓은 공감을 얻은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시간에 쫓긴다. 적절한 소득과 여유 있는 시간이 함께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장시간 노동 체제가 강요하는 시간빈곤의 구조를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선 근본적으로 시간 사용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개인이 갖는 ‘시간 주권’을 확립해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주체적 인간’의 시간이 임금을 볼모로 회사에 종속돼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의 지은이인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시간 주권은 내 삶의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리키며, 노동시간의 길이, 강도나 방식 등에 대한 결정권이나 조절권이 없이 주어진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기만 하는 삶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서구에서 보편화한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유연한 근무형태를 도입하는 데 한국 노동자들이 피해의식을 갖는 것도 ‘시간의 칼자루’를 줄곧 사용자가 쥐고 있었던 까닭일 수 있다는 얘기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노동시간을 뺀 잔여시간으로 생활시간을 보는 것은 뒤집힌 인식”이라며 “노동을 전제로 여가를 볼 게 아니라 삶을 전제로 해서 노동이나 여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