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미래포럼 기획] 1부 한국형 불평등을 말한다
④ 시간, 불평등의 새 얼굴

소득 따라 노동시간 계층화 
한국 노동시간 OECD 2위
가사·여가 희생해 저임금 보전
소득서 가사노동 구매비 빼니
빈곤율 3배 높아지는 분석도

저소득 여성이 시간빈곤 최고
고학력일수록 정규직-표준노동
여가-자녀 교육에 시간 많이 써
불평등 강화하고 대물림 심화
상시 5인 미만 사업장, 육상 운송 등 5개 특례업종은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서울의 한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에서 택시기사가 세차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시 5인 미만 사업장, 육상 운송 등 5개 특례업종은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서울의 한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에서 택시기사가 세차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에서 13년 남짓 회사택시를 몰아온 김경진(가명·52) 기사는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로 일한다. 새벽 4시에 나와 오후 4시에 차를 넘기고 집에 들어간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때는 저녁 7시. 그래야 다음날 새벽 3시 무렵에 일어날 수 있다. 김씨가 하루 중 집안일을 하고 가족을 돌보며 여가를 보내는 시간은 채 3시간이 되지 않는다. 한주에 70여시간, 한달 26일을 일하고 손에 쥐는 수입은 200만원 남짓.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싶지만, 기본급이 68만원에 불과한 형편에 수입이 줄어들까 쉽지 않다. 김씨처럼 수입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회사택시 기사는 전국에 10만8천명에 이른다. 올해 상반기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당 노동시간이 휴일 포함 최대 52시간으로 제한되지만 5개 특례업종 중 하나인 택시업은 예외다.

 
소득과 시간은 균형 잡힌 삶을 위한 두 축이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 고단하고, 시간이 없으면 아이와 놀아주기, 집안 가꾸기, 독서나 드라마 시청같이 행복감을 주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일하느라 바쁜 사람들이다. 해마다 발표되는 노동시간 국제비교에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이들이 가사나 여가에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는 ‘시간 빈곤자’들이다. 18살 미만 자녀를 둔 맞벌이 가정 6700곳을 조사한 서지원 방송통신대 교수(생활과학)의 2015년 연구를 보면 평일을 기준으로 남성의 20.7%, 여성의 29%가 시간 빈곤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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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중요한 자원인 소득과 시간은 어느 정도 대체관계에 있다. 택시기사 김씨처럼 장시간 노동으로 수입을 늘리면, 소득 빈곤은 벗어날 수는 있지만 시간 빈곤에 빠진다. 이때 시간 빈곤은 소득 빈곤의 심각성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시간에 주목하는 복지 연구자들이 빈곤을 소득과 시간의 함수로 보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레비경제학연구소는 노동시간이 길어서 식사 준비, 돌봄, 보육 등 필수적인 가사 재생산 시간이 부족할 경우, 이를 시장에서 구매할 때 드는 비용을 소득에서 차감해 빈곤선을 새로 책정하는 분석모델을 만들었다. 이 모델로 한국고용정보원과 함께 2008년 한국의 빈곤율을 측정한 결과, 가장이나 배우자가 고용상태인 가구의 빈곤율은 7.5%로 정부의 공식 빈곤율 2.6%보다 3배나 높아진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장시간 노동이 은폐했던 소득 빈곤이 확인된 것이다. 윤자영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소득 기준으로 불평등과 빈곤을 측정하고 대응하면, 소득은 높지만 시간이 빈곤한 집단의 삶의 질 문제에 대응하지 못한다”며 소득 때문에 시간을 희생하는 이들의 규모를 공식 통계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의 저소득층은 장시간 노동으로 소득을 올리면서 시간을 희생해왔지만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 여건 때문에 소득과 시간 빈곤 사이를 오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노동패널조사 자료(2014년)를 분석한 오혜은(성균관대)씨의 2017년 연구를 보면 여성의 44.6%, 남성의 23.6%가 시간(자유시간 기준)이나 소득 중 한가지 빈곤을 겪고 있었다. 시간과 소득 모두 빈곤인 경우도 여성의 9.1%, 남성의 2.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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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빈곤은 소득 규모와 성별에 따라 차등적으로 나타나고 이런 구조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시간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1998년 이후 소득과 노동시간의 관계를 분석해보면 시간당 임금이 높을수록 표준 노동을 하고, 중위임금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노동자는 초장시간 노동을 통해 소득을 보전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황규성 한국노동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소득에 따라 노동시간이 계층화하는 양상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시간 빈곤은 저소득 여성에게 두드러지는데, 앞서 오혜은씨의 연구에서 자녀와 배우자가 있는 여성 가구주의 경우 유급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중첩되어 시간 빈곤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삶은 ‘시간 사용’과 ‘돈 사용’ 사이의 선택인 경우가 많다. 똑같이 바쁘더라도 소득이 높으면 고속철도(KTX)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자녀도 좋은 보육시설에 맡길 수 있다. 반면 장시간 노동을 해야 겨우 생활이 가능한 계층은 보육이나 여가에 쓸 시간이 적고, 돈으로 대체재를 구매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시간의 불평등은 돌봄, 여가, 사회적 관계 등에서 격차를 만들어 다른 불평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연쇄 고리가 된다. 대표적인 것은 부모가 가진 시간에 따라 자녀 양육과 돌봄 시간의 질이 달라지는 점이다. 노혜진 케이시(KC)대 교수(사회복지학)의 2014년 연구를 보면, 고학력 부모가 저학력 부모보다 자녀를 돌보는 시간이 길고, 이런 돌봄 시간의 격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학력 부모는 정규직에 표준 노동을 할 가능성이 큰 집단이다. 또 시간이 부족할 때 인간관계를 줄이게 돼 삶의 중요한 자원인 ‘관계재’의 양과 질에서 격차를 불러온다. 시간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집단은 삶의 질을 개선할 기회가 제한되고 발전 잠재력이 위축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전문가들은 사회정책 수립자들이 시간의 분배를 고려할 때라고 지적한다. 소득의 분배와 재분배를 중심으로 복지정책이 개발됐지만, 여기에 시간을 고려함으로써 한층 효과적인 대책 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혜진 교수는 “부모의 노동시간이 너무 길거나 시간이 빈곤한 것도 가구가 겪는 큰 위기 중 하나”라며 “자녀 보육이나 늙고 병든 가족을 보살피는 돌봄을 공공이 제공하는 등 빈곤가구가 잃어버린 시간을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