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열기가 기억에 생생하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21세기 자본>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에서도 불평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피케티를 둘러싼 논란도 뜨거웠다. 그로부터 4년. 누구나 한국의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작 불평등에 관한 논의는 그때보다 줄어든 것 같다.
나라 밖 움직임은 다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계에서는 불평등 연구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피케티 논쟁과도 관련 있는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에 관한 연구에서 큰 진전이 있었고, 세계화가 불평등에 미치는 악영향과 불평등이 정치지형에 끼치는 효과를 분석하는 연구들이 잇따른다. 또한 불평등을 고려한 거시경제모형도 제시됐고, 라지 체티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등은 방대한 미시 데이터를 활용해 기회의 불평등에 관한 실증연구를 진행 중이다.
■ ‘세계 금융명부’ 만들어야
피케티 자신도 열정적으로 연구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대표적 성과물 중 하나가 그가 몸담은 파리경제대학의 세계불평등연구소에서 지난해 12월 펴낸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이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수십년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악화해왔으나, 나라마다 차이도 발견된다. 불평등의 동학은 제도적, 정치적 요인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미국과 유럽 모두 1980년엔 상위 1%의 소득 집중도가 약 10%로 비슷했지만, 2016년에 이르러선 20%와 12%로 차이가 생겼다.
세계 전체의 불평등도 확대됐다. 세계 상위 1%가 1980~2016년 성장의 과실을 약 27% 챙겨간 데 반해, 하위 50%는 겨우 12%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중국과 인도의 고도성장으로 하위층의 소득은 다소 늘어났지만, 선진국의 중하위층을 포함하는 세계 상위 2~50% 집단에선 소득이 거의 늘지 않았다. 미국 뉴욕시립대학의 브랑코 밀라노비치 교수가 강조하듯이, 이들의 분노가 바로 포퓰리즘이 등장한 배경이다. 부의 불평등도 심화했다. 미국에서 상위 1%의 부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22%에서 2014년 39%로 높아졌고,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상위 1%의 부 집중도가 1995년 이후 약 2배로 확대됐다.
그렇다면 세계의 불평등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세계 상위 1%의 부 집중도는 2016년 33%에서 2050년 약 39%로 높아지고, 같은 기간 소득 집중도 역시 20%에서 24%로 늘어날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은 모든 나라가 유럽처럼 소득 재분배 정책을 강화한다면 2050년 세계 상위 1%의 소득 집중도가 18%로 외려 낮아질 것이라 강조하면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수단도 함께 제시했다.
세계 상위 1%에 쏠린 ‘부의 집중’
2016년 33%→2050년 39% 예상
미국은 물론 중국·러시아 등 ‘심각’
최상위 조세회피 막을 방법 없나
세금 불평등, 누진성 향상이 해법
‘세계 금융명부’로 투명성 높여야
■ 정치지형의 변화가 불평등 심화시켜
피케티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결국 모든 건 정치에 달려 있다. 피케티는 올해 초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해 커다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프랑스·영국·미국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장기적으로 변화해왔는지를 추적하면서 이를 불평등 확대와 연결지었다. 1950~60년대에 사회당, 노동당 그리고 민주당 등 각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은 주로 저학력과 저소득층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고학력의 엘리트 계층이 진보정당에 더 많이 투표하는 반면, 부자 엘리트는 여전히 보수정당에 표를 준다. 프랑스의 경우 1950~60년대엔 고졸자 중 진보정당 지지자 비율이 대졸자와 비교할 때 20% 많았지만, 2000년대에는 역전돼 외려 10% 적어졌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는데,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특히 심했다. 따라서 이제 진보정당은 지적인 엘리트인 ‘브라만 좌파’의 당이고 우파는 비즈니스 엘리트(상인 우파)의 당으로 변했다는 게 피케티의 진단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피케티는 세계화와 이민의 확대, 그리고 전반적인 교육수준의 상승을 원인으로 꼽았다. 유권자들은 이제 소득 재분배보다 세계화와 관련한 쟁점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고학력자들은 대체로 세계화를 찬성하는 진보정당을 더 많이 지지했다. 또한 대학교육이 확대되고 유권자 분화가 나타나면서 재분배를 지지하는 저교육·저소득층의 영향력은 줄어든 반면, 높은 소득을 누릴 가능성이 큰 고학력자들은 재분배를 강력히 지지하지 않았다. 피케티는 이런 정치지형의 변화가 최근 불평등 심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정치의 미래? 피케티에 따르면 몇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첫째는 현재와 같은 다층적 엘리트 시스템이 안정화되는 것이고, 둘째는 정당 구조가 현재와는 정반대로 고학력·고소득 ‘세계화주의자’ 대 저학력·저소득 ‘토착주의자’로 재정렬되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 프랑스의 선거 결과를 보면 이러한 가능성이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과거처럼 계급에 기반을 둔 재분배 갈등이 다시 나타나 정치가 재편되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 경우 부자들의 세계화를 통제하는 강력한 평등주의와 국제주의 정책 없이는 진보정당 내에 다양한 저학력·저소득 유권자들을 통합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본다.
‘상인 우파’ 키운 건 ‘브라만 좌파’
미온적 기득권 개혁·규제 밀어붙여
분노 틈탄 우파 포퓰리즘 세 늘려
불평등 해소, 한국에서도 ‘결국 정치’
중상류층, 현 정부의 주요 지지세력
‘피케티의 경고’ 한국사회에 화두 제시
■ 중도좌파 정부가 재분배에 소극적인 이유
이와 관련해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등 1990년대 중도좌파 정부들의 실패한 역사는 진지하게 돌아볼 만하다.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의 공동편집인인 로버트 커트너는 지난 4월 펴낸 <민주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늘까>라는 책에서 세계화를 밀어붙인 이들 중도좌파의 실패가 불평등을 심화시켰으며, 그에 대한 분노가 브렉시트나 트럼프로 상징되는 우파 포퓰리즘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피케티의 연구는 중도좌파 정부가 적극적인 소득재분배나 자본에 대한 규제에 미온적이었던 이유도 지지층 변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학 경제학부 교수
△토마 피케티 약력
1971년생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1993년 프랑스 경제학회가 주는 ‘올해의 최고논문상’ 수상
1993~1995 미국 엠아이티(MIT) 경제학과 조교수
1995~2007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
2007~현재 프랑스 파리경제대학 교수
2015년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 경제자문
2017년 프랑스 사회당 대선 후보 브누아 아몽 캠프 활동
* 주요 저서
<21세기 자본>,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