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피케티 “불평등에 눈감은 정치, 그 블랙박스 열고 싶어”
[토요판] 커버스토리‘불평등 연구자’ 토마 피케티1971년생인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는 스스로를 ‘포스트냉전세대’라 부른다. 포스트냉전세대인 자신이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자유롭게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게 그의 강한 믿음이다. 피케티 교수가 지난달 30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300년 자본주의 역사에 담긴 불평등의 동학을 담아낸 저서 <21세기 자본>으로 파장을 불러일으킨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4년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그가 새로 던진 화두는 ‘불평등의 정치’였다. 지난 30일 <한겨레>는 그를 만나 불평등에 대한 해법을 물었다. ‘90% 팩트(사실)와 10% 정치’. 5년 전인 2013년 <21세기 자본>을 출간해 단숨에 ‘스타 경제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는 이 책의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눠 설명하곤 했다. 전체 분량의 90%는 300년 동안 자본주의가 걸어온 실제 역사이고, 마지막 10% 분량에 소개된 정책 제안은 독자가 판단할 몫이라고. 자신은 오로지 데이터에 충실하게 불평등 현실을 드러내는 쪽에만 힘을 실었다는 뜻이 담겼다. 그로부터 5년. 피케티의 발걸음은 ‘10%’ 쪽으로 성큼 옮겨가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파리경제대의 세계불평등연구소에서 지난해 연말 펴낸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 작업을 주도적으로 이끌긴 했으나, 개인적 관심사는 정치 영역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한 지 오래다. 그는 1948~2017년 프랑스·영국·미국의 선거 데이터를 분석한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라는 논문을 올해 초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불평등한 현실 자체보다는,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게끔 가로막는 정치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독일과 일본 등 7개 나라의 선거 결과를 추가로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정치를 연구하는 경제학자.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보강·확대할지언정 불평등 연구의 방법론과 분석틀은 빈틈없이 완성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현실 정치(세력)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을 반영한 것일까? 머릿속을 맴도는 궁금증을 안은 채, 2014년 9월에 이어 4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피케티를 지난달 30일 만났다. 피케티는 지난달 30~31일 이틀간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제9회 아시아미래포럼 첫날 행사에서 기조강연을 하려고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전 그의 기조강연 시간엔 약 600석의 행사장이 빼곡하게 들어찼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해 서 있는 방청객도 많았다. 인터뷰는 행사장인 서울 용산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기조강연과 점심식사를 마친 뒤 진행됐다. 지난달 30일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실질적인 정책 변화 없지 않나” “미안한데, 그건 묻지 말아달라.”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 ‘당신 책이 엄청난 인기를 끄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냐’며 무심코 던진 첫 질문에 피케티의 반응은 단호했다. 한국 독자들의 열띤 반응(11만부 판매)에 대한 생각을 가볍게 물어도 “4년 전에 다 했던 얘기다. 되풀이해서 말하고 싶진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이해되는 구석이 없진 않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21세기 자본>은 43개국에서 번역 출판돼 약 250만부가 판매됐다. 이렇다 보니 온갖 가십성 기사도 끊이지 않는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아마존 킨들버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문장 5개가 모두 앞부분 26쪽까지에 들어 있다며 정작 사람들은 전체 분량의 단 2.4%만을 읽었을 것이라고 조롱하듯 추정하기도 했다. ―불평등 확대가 현대 자본주의에 심각한 위험이 되리란 진단이 등장한 지 10년도 훌쩍 넘었다. 요즘은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주류 성향의 국제기구들조차 불평등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라는 정책 권고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불평등 문제를 바라보는 분위기가 확실히 변한 건가? “천만에! 국제노동기구(ILO)라면 모를까, 나머지 국제기구는 죄다 보수적이다. 입으로는 불평등에 관심 있다고 떠드는데, 진짜 관심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실질적인 정책 변화가 없지 않나.” 피케티는 대표작 <21세기 자본>이 분배 문제를 경제학의 중심 의제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시도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현대 주류 경제학이 분배를 경제학의 연구 대상에서 사실상 깔끔히 지워버린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약 150년 전 출간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따온 듯한 제목을 붙인 이유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43개국 250만부 팔린 ‘21세기 자본’ 분배 문제 경제학 중심의제로 올려 300년간 역사 데이터 분석 토대로 자본주의 불평등 동학 존재 밝혀내 기술혁신 과소평가 등 한계도 뚜렷 ‘불평등과 젠더 관계 외면’ 비판도 “출산율 낮으면 상속 중요성 더 커져 여럿에 줄 것 한명에게 몰아주는 셈” 프랑스·영국·미국 선거 결과 다룬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 논문 화제 “나의 관심사는 불평등 심화되는데 재분배 요구로 이어지지 않는 현실” <21세기 자본>의 핵심은 20여 나라의 300년간의 역사적 데이터를 분석해 자본주의 내부에 불평등을 확대하는 동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피케티는 20세기의 일부 예외적인 기간을 빼면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언제나 웃돌았다는(r>g) 결론을 얻었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웃돈다는 얘기는 자본 소유자들이 경제 전체 평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윤을 챙겨간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부가 늘어나는 방법은 두가지다. 일을 해 벌어들인 소득을 저축하거나, 아니면 과거에 축적된 부를 불려나가거나. 분석 대상이 된 모든 나라에서 과거의 부, 물려받은 부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게 피케티의 결론이다. 불평등이 확대되는 근본 원인이자, 땀과 노력보다 핏줄과 태생이 더 중요한 세습사회의 귀환이다. <21세기 자본>이 세상에 나온 뒤 찬사와 비판이 동시에 쏟아졌다. ‘피케티 신드롬’이란 말도 등장했다. “앞으로 10년간 가장 중요한 경제학 책이 될 것”(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이라는 예견과 ‘21세기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식의 딱지 붙이기가 공존했다. 피케티의 작업에 한계가 없는 건 아니다. 전통적인 경제이론과는 달리 ‘자본’ 개념에 금융자산, 주식·채권 등을 모두 넣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기술 발전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등 적잖은 문제점도 드러냈다. 자연스레 여러 각도에서 비판이 제기됐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2014년 ‘피케티의 오류’를 조목조목 짚는 기획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하지만 같은 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21세기 자본>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학문적 엄밀성을 결여한 비난이나 오해를 제쳐놓는다면, 진짜 뼈아프다고 느낀 비판이 있었나? 있었다면 어떤 비판이었나? “특별히 뼈아픈 대목은 없었다. 책에 대한 반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나. 이제 와서 <21세기 자본>을 다시 쓴다고 해도 똑같이 쓸 거다. 물론 5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새로운 나라나 이슈는 조금 추가할 수 있을 테지만.” 지난달 30일 서울 용산 서울드래곤시티호텔에서 한겨레신문사 주최로 열린 제9회 아시아미래포럼 개회식에서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얼치기 수학’이라는 비판 피케티는 1990년대 2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의 대학(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짧은 교수 생활을 했다. 2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간 이유를, 그는 훗날 “미국 경제학의 수학적 추상성에 환멸을 느껴서”라고 밝혔다. 그의 <21세기 자본>은 복잡한 수학모델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역사적 서술에 집중했다. 그는 책 출간 뒤 한 외신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두꺼운 학술책을 읽지 않는데 이 책을 다 읽고 이해했다”며 “복잡한 수학모델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소득과 부, 불평등과 자본이라는 주제를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미국 뉴욕대 교수는 2015년 한 논문에서 우리말로는 ‘얼치기 수학 흉내 내기’쯤으로 번역될 ‘mathiness’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피케티를 포함한 일부 연구자들의 작업을 비판해 화제가 된 적 있다. 겉으로는 수학모델을 거부한다면서 실제로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방법론을 사용했다는 비아냥의 의미로 읽힌다.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당신 입장에선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을 법하다. “(짐짓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글쎄… 나를 겨냥한 비판은 아닌 것 같다.” 그를 향해 ‘젠더의 렌즈’가 빠져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불평등과 젠더의 관계라는 문제의식을 처음부터 빠뜨렸다는 비판이다. “‘고루한(old-fashioned) 남성 경제학자’일 뿐”이란 혹평을 쏟아내는 일부 페미니즘 경제학자들도 있다. ―억울한가? 지나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드나? “불평등 연구의 방향이 젠더 문제를 포괄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 건 분명 맞다. 다만 내 책(<21세기 자본>)엔 제약이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 책 분량이 1만페이지라도 된다면 모를까. 겨우 1천페이지(프랑스어판) 정도인데….” ―어떤 제약을 말하는 건가? 자료상의 제약이라는 뜻인가? “역사적으로 여성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게 된 건 얼마 안 된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은 재산을 소유한 적이 없다. 앞으로는 연구가 진척될 수 있겠으나, 내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부와 재산의 집중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다. 젠더와 관련된 불평등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양해해달라.” ―한국은 물론이고 성평등 정도가 높다는 미국이나 유럽에서조차 ‘유리천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여성의 잠재력을 적극 활용한다면 성장 능력을 더 키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신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경제성장률(g)이 높아져 결과적으로 자본수익률(r)과 경제성장률의 격차가 줄어들면 불평등이 완화될 수 있다는 결론도 가능할 텐데? “성별 불평등은 전세계적 현상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가 늘어난다 치자. 성장률이 일시적으로 오를지는 모르나 영구적이지는 않다. 그보다는 출산율 저하가 더 심각한 이슈다. 출산율이 낮다는 얘기는 유산 상속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뜻이다. 여럿에게 나눠줘 분산할 걸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셈이니까.” 부모는 ‘68혁명’ 때 극좌 정치조직 활동 최근 그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불평등에 맞서는 정치적 대응이다. 왜 민주주의는 불평등 해소에 실패했는가, 불평등이 확대되는데도 왜 강력한 재분배와 복지국가 요구가 유권자들 사이에 불붙지 못하는가 등. 피케티는 인터뷰 당일 오전 아시아미래포럼에서 한 ‘불평등: 현재와 미래’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에서도 이와 관련한 최근의 연구 결과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세계화의 진전과 교육의 확대로 유권자 구성이 점차 변화하면서 서구 주요 나라의 정치지형이 고학력 엘리트(브라만 좌파) 대 고소득·고자산(상인 우파)의 대립구도로 점차 변했다는 게 요지다.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정치적 노력이 전반적으로 줄어든 배경이다. ―고학력 엘리트냐, 고소득·고자산 엘리트냐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다만 경제적 지위에 따라 교육 기회마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학력 집단과 고소득·고자산 집단을 대립시키는 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도 든다. “결국은 실증의 문제다. 분석 대상을 넓혀가는 중이다. 좀더 지켜보자. 나의 주된 관심사는 불평등 심화가 재분배 요구로 이어지지 않는 분명한 현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신의 최근 작업은 불평등 연구라기보다 ‘불평등 정치’의 연구라는 느낌이 든다. 경제학자로서 정치 영역에 이토록 많은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이유가 궁금하다. “같은 얘기다. 정치를 블랙박스라 생각해봤다. 불평등이 이 정도로 심해졌는데도 왜 정치적 대응이 미온적인지 늘 궁금했다. 정치라는 블랙박스를 꼭 열어보고 싶었다.” 피케티는 현실 정치와 비교적 거리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선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의 경제자문 일을 맡았고, 2012년엔 사회당 소속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영국 노동당, 스페인의 좌파정당 포데모스의 정책자문단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원초적 관심, 나아가 현실 정치에 대한 ‘애정’을 그의 개인사와 묶어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피케티의 아버지는 기술자,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두 사람은 68혁명 당시 ‘노동자 투쟁’(Lutte Ouvri?re)이란 이름의 극좌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에서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피케티는 “(불평등 연구는) 이념적 신념이 아니라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여러차례 강조해왔다. 흥미로운 점은 피케티가 과거 영국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글로벌 자산세’와 관련한 질문에 “나는 시장의 힘을 믿는 시장주의자”라고 말하면서 “(글로벌 자산세 도입은) 자본주의 체제에 매우 실질적 변화, 곧 영구혁명”이라고 말한 점이다. ‘영구혁명’은 러시아혁명 당시 활동가 레온 트로츠키의 핵심 정치이론이자 그의 대표작 이름이다. 가로축은 전세계 인구를 소득 수준에 따라 100개의 집단으로 나눈 것을, 세로축은 각 집단의 평균적인 소득증가율을 뜻한다. 신흥국들의 부상으로 전세계 중하위 집단의 증가율은 높았으나, 주로 미국과 서유럽의 중하위 계층이 포함된 전세계 중상층의 증가율은 낮았다. 전체 윤곽이 코끼리 모양을 띤다 하여 ‘코끼리곡선’이라 이름 붙였다.“글로벌 금융등록제, 충분히 가능” ―문제는 ‘어떻게’다. 불평등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해법은 뭔가? “결국 세금이다. 소득세 누진율을 더 올려야 한다. 미국이 연방 소득세 최고세율을 91%까지 올렸을 때도 미국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다. 누진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1950~70년대 시기에 생산성 증가율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18>에서 말한 ‘글로벌 금융등록제’(financial register)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 가능하다고 보나? “획득한 정보를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신뢰만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준다면 충분히 잘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개별 국가의 행정체계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피케티는 전세계 소수의 최상위 계층이 보유한 자산에 물리는 ‘글로벌 자산세’의 기초를 닦기 위해 금융자산의 소유권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글로벌 금융등록제’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토지와 부동산처럼 금융자산에 대해서도 일종의 ‘등기’ 제도를 도입해 재산 도피와 세금 탈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얘기다. 전세계 조세회피처에 숨겨진 자산이 세계 총생산의 10%를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글로벌 차원의 탈세가 각국 정부한테서 약 3500억유로(450조원) 규모의 조세수입을 부당하게 앗아간다는 보고서도 나왔다. 피케티는 현재 대부분 나라에 존재하는 증권예탁기관의 역할을 강화한다면 글로벌 금융등록제가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부분 나라에서 증권예탁기관은 민간기관이라 정보 제공을 강제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나?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대부분의 은닉 자산이 서류상 회사에 등록돼 있다. 형식상의 주인과 실제 소유주가 다른 경우도 많다. 한계가 분명하다는 반론도 있는데? “기술적으로 전혀 복잡하지 않다. 반대 주장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일 뿐이다. 글로벌 등록제 도입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일 뿐이다.” “결국은 세금…누진세율 더 높여야” “소득세 91%까지 올렸을 때도 미국 자본주의 붕괴하지 않았다” 금융자산에도 ‘등기’제도 도입 주장 한국사회 불평등 대책 조언은 교육 접근성 확대와 과세 투명성 “최근 한반도 화해 분위기 놀라워 냉전 벗어나 불평등 논의할 적기” “드러난 문제만 제대로 고친다면 세상은 더 나은 방향 갈 수 있다” “어느 선까지 불평등 수용할지 결정하는 건 결국 정치의 몫” 피케티한테선 경제 논리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하자면 ‘경제 결정론’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는 20세기 동안 일시적으로 불평등이 완화됐던 조건은 전쟁, 혁명, 공황 등 세가지였다고 말하면서 “독특한 환경”이란 표현을 썼다. 하지만 역시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의 끝은 ‘정치’였다. “전쟁이 불평등을 완화한 게 결코 아니다. 전쟁이 정치구조를 변화시켰을 뿐이다.” ―불평등과 맞서는 일은 한국 사회의 최대 과제다. 불평등 해소 대책과 관련해 한국 사회에 조언을 한다면? “과세 등 정책 전반의 투명성을 높이고 교육 접근성을 확대하라는 것, 두가지다. 교육 분야에서 더 많은 공공재를 제공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불평등, 특히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젊은 세대의 불만이 높다. 해법이 뭘까?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조세 체계가 젊은 세대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사회의 소중한 자원들이 젊은 세대로 원활하게 흘러들도록 조세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피케티는 인터뷰 전날인 지난달 29일 저녁 아시아미래포럼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한국 사회에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4년 전 한국에 왔을 땐 정치적 긴장감 같은 게 느껴졌고 냉전적 사고에서 내 책에 대한 공격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4년 9월 <21세기 자본> 국내 번역본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바 있다. 이어 그는 “최근의 한반도 화해 분위기가 놀랍고 매우 감동적”이라며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냉전에서 벗어나 불평등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적기”라고 말했다. ‘포스트냉전세대’라는 자의식 어느덧 대화는 끝자락에 이르렀다. <21세기 자본>의 첫 구절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인권선언 제1조에서 끌어온 문구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인권선언 제1조의 이 문구 앞에는 ‘모든 사람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문장이 있다. ―인권선언 제1조 문구 일부를 <21세기 자본>의 첫 구절에 담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런가? “사람들이 평등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인권선언 제1조는 사실 두 문장으로 나뉜다. 첫째 문구에서 평등한 권리를 말하면서, 둘째 문구는 특정 상황에선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0년도 훨씬 전에 나온 글이지만, 여러 의미에서 제1조는 매우 흥미롭다.” ―정확히 무엇이 흥미로운가? “현대사회뿐 아니라 모든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수용하는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단, 공동의 이해가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시대에 따라 불평등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이유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과연 어느 선까지 수용 가능할까, 그 선을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내 연구작업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지난달 30일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1971년생인 피케티는 스스로를 ‘포스트냉전세대’라 부른다. 1989년 18살의 청년 피케티가 파리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직후 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청년 피케티는 지체없이 혼돈의 동유럽을 마음껏 여행하며 사회주의의 음울한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젊은 날의 이런 경험 때문일까. 피케티는 그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스트냉전세대인 자신이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자유롭게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흑백 논리만을 강요하는 냉전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오로지 ‘자본주의의 문제’로 불평등을 진지하게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색깔론’을 벗어던지고 싶은 바람도 분명 있었을 터다. ―내년이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다. 30년 사이 불평등은 훨씬 확대됐다.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20년 가까이 매달려온 학자로서, 만일 30년 전 동유럽의 사회주의 현실을 둘러보던 10대 후반의 청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 “(한참을 생각하다가) 글쎄… 30년 전 내가 자본주의에 정확히 무엇을 기대했는지, 어떤 것을 예상했는지 모르겠다. 뭐라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결코 현재가 실망스럽거나 아쉽거나 하지는 않다. 그동안 세상에 대해 많이 배웠다. 축적한 지식이 이롭게 사용되도록 노력하고 싶다. 연구자로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성을 계속 강조할 뿐이다.” “내가 비관주의자라고?” ―이제껏 당신이 비관주의자일 거라고 짐작해왔다. 오전 기조강연에서 자신을 ‘합리적 낙관주의자’라 말해 조금 놀랐다. “내가 비관주의자라고? 전혀 아니다. 완전한 오해다.” ―눈앞의 불평등에 분노하고 불평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미래를 낙관하는 근거가 뭔가 궁금하다. “글쎄… 2세기 전과 현재를 비교해봐라. 세상은 더 좋아졌다. 식민주의도, 노예제도도, 공산주의도 없지 않나. 드러난 문제를 고친다면 세상은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난 이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자유무역이나 자본 이동도 그 자체로선 나쁜 게 아니다. 재분배라는 보다 큰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얘기다. 자유무역이나 자본 이동 하나에만 매달리는 건 문제다. 시각을 바꿔야 지속 가능하고 평등한 발전이 가능하다.” 피케티는 오전 기조강연을 마치면서 “다음에 만날 땐 지금과는 다른 정치지형이라면 좋겠다”고 스치듯 말했다.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이 턱없이 부족한 오늘날의 전세계 정치지형 일반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표현으로 들렸다. 불평등이라는 어둡고 칙칙한 주제에 매달린 인터뷰를 끝내면서도 그가 내뱉는 이야기의 색조는 여전히 곱고 밝았다. 얼굴 가득한, 다소 시큰둥한 표정과 낙관적 메시지를 분주히 전하는 빠른 입놀림. 어울릴 듯 말 듯 묘한 대조였다. 절망스러운 현재를 끝낼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는 듯이.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한겨레에서 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68649.html#csidx75191cdc9566813aeae984cb370db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