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로 비틀린 도시, ‘열린 시스템’이 더욱 절실한 이유
[2019 아시아미래포럼] 기후변화와 도시의 정치·사회적 영향기조강연: 리처드 세넷 런던정경대 명예교수기후변화가 부른 도시의 무질서적응과 개방적 자세 필요‘어떻게 협치를 끌어낼 것인가’도시가 직면한 사회·정치적 과제기후변화에 따라 날로 그 규모와 강도가 커지고 있는 풍수해는 도시를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해 갈 지 고민하게 한다. 사진은 지난 9월 허리케인 도리안이 엄습했을 때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하마의 프리포트에서 한 소녀가 강아지와 함께 구조되는 모습. AP/ 연합리처드 세넷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는 ‘석학’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르네상스형 학자이다. “하도 사통팔달해서 어떤 모임에서든 다른 참석자를 모두 합쳐도 그의 박식함을 따라가기 힘들다.” <제3의 길> 저자인 앤서니 기든스가 세넷을 평가한 말이다. 사회학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 음악, 예술, 역사, 문학, 정치, 경제 등에 두루 조예가 깊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서 <장인>, <투게더>,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등이 다루는 주제만 봐도 그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알 수 있다. <겁 없이 울어댄 개구리>를 포함해 소설책도 세 권 냈다. 세넷은 아시아미래포럼 첫날인 23일 오전 기조 연사로 무대에 올라 ‘기후변화와 도시의 정치·사회적 영향’을 주제로 강연한다. 76살 노학자가 한국 청중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다. 그는 <한겨레>에 보낸 이메일에서 “기후변화는 오늘날의 도시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문제”라며 “이런 환경적 도전이 도시 내부의 사회·정치적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얘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회학자로서 세넷은 도시를 건설하는 방법과 그 속에서 주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연결하는 연구를 좋아했다. 바둑판 모양의 도로, 수직으로 올라간 빌딩 등 직선의 도시에서 ‘굽은 나무’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넷은 ‘빌’(Ville)과 ‘시테’(Cit?)라는 개념 틀로 이를 분석하고 설명한다. ‘빌’은 물리적 장소로서의 도시이며, ‘시테’는 그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거주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엉성하게 설계된 뉴욕의 어느 터널에서 빚어지는 차량 정체는 ‘빌’의 문제이지만, 수많은 뉴욕시민이 아침부터 일어나 터널을 지나 달려야 하는 무한경쟁은 ‘시테’의 문제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돼 출간될 예정인 그의 책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김영사)에서도 이런 틀로 도시를 들여다본다. 세넷이 보기에 ‘빌’과 ‘시테’는 비대칭이어서 고통스럽다. 예를 들어, 서울역 새 청사를 아무리 현대적으로 만들어도 노숙인은 저녁이면 여전히 골판지로 텐트를 친다. 그래서 세넷은 ‘열린 도시’(Open City)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는 복잡성, 모호성 그리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칸트가 말한 “인간이란 ‘비틀린 재목’으로는 곧은 물건을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시는 “수십개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성분의 이민자로 가득하기에” 또 “그 속의 불평등이 너무나 확연하기에” 비틀려 있다. 도시를 바라보는 세넷의 이런 접근법은 그가 1970년대에 쓴 <무질서의 효용>(다시.봄)에서부터 일관된 흐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질서정연하지만 단조로운 삶을 살 것인가, 무질서하지만 생기있는 삶을 살 것인가”라고 물으며 “다양성과 창조적인 무질서를 구성원 스스로가 통합해 가는 도시, 살면서 만나는 갖가지 시련과 도전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도시를 만들자고 제안한다.리처드 세넷. <한겨레> 자료사진 세넷에게는 기후변화도 도시의 비틀림 가운데 하나이다. 그 격동과 불확실성은 어느 도시에서든 파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2014년 10월9일치)에 한 기고에서 세넷은 2012년 10월 말 자메이카와 쿠바, 미국 동부 해안에 상륙해 해변은 물론 내륙에도 큰 타격을 준 대형 허리케인 샌디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샌디는 폭풍의 강도나 영향이 미친 범위에서 그 앞의 어떤 허리케인보다 무시무시했다. 언론은 기후변화가 몰고 온 재앙이라고 보도했다. 폭풍이 지난 뒤 바닷가 주민들은 살던 곳을 떠나기보다는 재건을 원했다. 지역사회도 이를 위해 벽을 세우고 둑을 쌓는 비용을 낼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디자인을 통한 재건’(Rebuild by Design)이란 프로그램이 내린 과학적 결론은 이런 대응책은 지속가능하지 않고, 일부 지역은 급속도로 해체되고, 주민은 흩어지며, 어떤 곳은 버려진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세넷은 이를 ‘완화’(mitigation)와 ‘적응’(adaptation)의 차이라 규정한다. 둑을 쌓아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재건이 도시를 계속 유지하려는 ‘완화’ 전략이라면, ‘적응’ 전략은 도시의 많은 것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의 ‘적응’은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힘 때문에 도시 형태의 통일성이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후위기는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대한 방식인 ‘통제’(control)를 까다롭게 만든다. “예측 불가능함”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의 변덕은 우리에게 미래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열린 시스템”의 논리다. ‘적응’하기 위해 도시는 더는 정연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볼 때 ‘완화’와 ‘적응’의 차이는 한 도시가 토론과 투표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과, 자연의 힘에 순응해 정책을 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다. 그는 “자연은 비민주적이다. 투표와 포용은 기후변화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며 “집단의지는 적응 전략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세넷은 기후변화가 불러온 도시의 무질서를 인정하고 적응해 가되 좀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삶이 가능하도록 ‘협치’(governance)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지가 도시가 직면한 사회적·정치적 과제이다. 세넷은 “일부 지역은 물을 제한 급수하는 법을 제정하고, 홍수에 노출된 일부 지역을 포기하는 전략을 세우며, 더는 석탄을 태워서 발전할 수 없으므로 전기를 제한 송전할 수도 있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래된 습관을 고치는 걸 미룰수록 문제는 더 악화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세넷은 1943년 1월1일 미국 시카고에서 공산주의자 아버지와 노동운동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세넷은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태어나고 몇 달 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그곳에서 만난 여전사와 사랑에 빠져 모자를 두고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보장 대상자로 흑인 빈민, 전쟁 부상자들과 함께 공동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매카시즘이 극성을 부리던 당시, 좌파 아버지를 둔 그의 가족은 감시 대상이었다. 20대에는 미국 신좌파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 운동이 반지성주의로 치닫는 데 실망해 한때 우파로 전향했다 돌아오기도 했다. 세넷은 13살에 첼로 연주회를 열 정도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살 무렵 첼리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다. 손목뼈에 난치병이 생겨 더는 활을 당길 수 없게 돼서였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세넷에게 하버드대 한 사회학 교수가 입학을 제안하면서 사회학도로서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 1960년대에는 한나 아렌트에게 배우기도 했다. 첼리스트를 꿈꾸었던 사회학자 세넷은 활 대신 펜을 쥐고 <장인>(21세기 북스)이란 책을 써 내려간다. 인류 문명을 직조해왔으나 이제는 잊히고 있는 ‘생각하는 손’을 다룬 이 책은 헤겔상, 스피노자상을 수상한 세넷의 대표작이 됐다. 이후 세넷은 여러번 팔목 수술을 받은 덕에 다시 첼로를 켤 수 있게 됐고, 가끔 동호인들과 연주를 즐긴다고 한다. △리처드 세넷 1943년 미국 시카고에서 출생 하버드대 미국문명사 박사 뉴욕대 인문학 교수 현 런던정경대(LSE) 사회학 명예교수 현 유엔 도시와 기후변화 프로젝트 선임자문관 주요 저서: <무질서의 효용>, <살과 돌>,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 <뉴 캐피털리즘>, <장인>, <투게더>,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bhlee@hani.co.kr한겨레에서 보기:http://www.hani.co.kr/arti/economy/heri_review/913517.html